기획연재 내고장 명품 명소를 새로 보자

나의 제안

미사리에 야외박물관 세우자

● 양훈도(경인일보 논설위원)

● 미사리엔 카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사리’ 하면 사람들은 대개 반사적으로 ‘조정경기장’을 떠올린다. 88올림픽을 치러낸 이곳은 4월에는 경정장(競艇場)으로 또 한번 새롭게 여론의 조명을 받을 전망이다. 그 다음으로 미사리라는 지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말은 ‘카페촌’이다. 한강변을 따라 줄줄이 들어선 미사리 카페촌은 흘러간 통기타 세대 가수들의 라이브공연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미사리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하남시민이나 서울시민이라면 최근 1∼2년 사이에 잘 조성된 자연생태공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사리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고고학과 역사학의 보물창고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행정구역상 미사리는 하남시 미사동이지만 미사리라는 옛 이름이 더 귀에 익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선사유적지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곳이다. 당시만 해도 동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남서쪽으로 샛강이 흐르는 섬이었다고 한다. 미사섬은 김원용박사에 의해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처음 보고된 이래 1979년엔 섬의 북쪽 일부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 올림픽을 위한 조정경기장 건설과 한강종합개발 과정에서 미사리 유적의 훼손·멸실 가능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미사리 일대는 신석기 시대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한성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주거지와 유물이 출토되는 중요한 유적지로 밝혀졌다. 말하자면 미사리는 한반도의 초기문명 40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옛 선조들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발굴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1992년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백제시대의 밭이 대규모로 발굴되었고, 지난해에는 세종대 박물관팀이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등 신석기·청동기 유물과 함께 초기 삼국시대 집터와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A.D. 1∼2세기 무렵의 철제 가래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유적으로 야외박물관을 세우고 공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학자는 캐나다 출신의 마틴 T. 베일 박사(한국문화재보호재단 연구원). 베일 박사는 지난 2월 26일 하남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2002년 하남 미사동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경청할 만한 주장을 내놓았다.
‘동아시아에서 미사동 유적의 위치’라는 주제의 이 학술회의에서 베일 박사는 <미주(美洲)고고학과 미사리 유적에 대한 연구의 방안>이라는 논문을 통해 미사리 유적처럼 의미있는 유적은 전문가의 연구영역으로만 둘 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에서 하듯이 야외박물관식 공원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베일 박사가 볼 때 미사리 유적은 ‘현대고고학의 이론을 적용시킬 고고학적 자료가 한국의 어느 유적보다 풍부한 곳’이므로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을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함으로써 문화를 바르게 인지하고 사랑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미사리 유적 발굴현장(왼쪽)과 청동기 시대 집터.

● 선사문화 발달 가장 잘 보여주는 중심지역
나는 베일 박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를 비롯한 여러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미사리 유적에 대해 내리고 있는 평가와 유적이 처한 현실 및 보전 대책을 두루 감안할 때 야외박물관 구상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남시라는 작은 자치단체에게 그것이 안겨줄 문화적 경제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미사리 야외박물관은 빨리 들어설수록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이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미사리 유적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다양한 문화층을 한꺼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사리 유적은 무려 34개의 층위를 갖고 있다. 1개 층에는 짧게는 수십년에서 수백년간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문화가 화석처럼 퇴적돼 있다.
가장 아래층 유물의 연대를 측정해 보면 B.C. 4000년경까지 소급된다. 비옥하고 살기 좋은 한강변의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하나의 문화가 어떤 이유에서인가 소멸되고, 그 위에 새로운 흙이 덮인 뒤에 또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들이 정착해서 사는 일이 34차례나 되풀이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층위 변화가 미사리 전체에서 순차적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고, 한 층이 꼭 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각 층위간에 문명이 연계 내지는 계승됐다고 보기도 힘들다. 학자들 간에도 층위의 개수부터 각 층위의 형성 주체와 생활방식, 층위간의 연속성에 이르기까지 견해가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 장소가 4000년 이상 차곡차곡 쌓인 세월을 이보다 더 생생히 보여주기는 어렵다. 이것은 문명 발생 초기에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법과 집을 짓는 방식,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미사리 유적은 베일 박사의 지적대로 집과 취락 구조의 변화상을 잘 드러내준다. 신석기시대의 수혈주거지와 야외원형노지를 비롯해서 청동기 시대의 방형과 장방형 수혈주거지, 서력기원(AD)을 전후한 시기인 원삼국 시대의 원형, 철자형(凸), 여자형(呂) 주거지, 그 이후 초기 백제 시기의 원형, 타원형, 육각형 집터가 각각의 해당 층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들 주거지와 저장시설의 변화를 통해 부뚜막과 온돌 등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을 뿐더러, 집들의 배치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생산활동과 사회 구조도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연세대 원주박물관의 신석정 학예연구실장은 미사리가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발달을 가장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한강 중하류에서도 중심지역’이며, ‘이것으로 대규모 취락의 형성과 계층사회의 존재를 예상할 수 있어, 앞으로 이것이 논증된다면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청동기문화의 상(像)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사리 유적지에 야외박물관을 만들 경우 서울 암사동의 선사유적지보다 훨씬 앞서는 역사고고학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기껏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둘러보고 체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더 나아가서 고려·조선과 현대에 이르는 가옥과 취락 박물관으로 조성하기에 미사리보다 알맞은 곳을 찾기 힘들 것이다. 더욱이 관람객들은 현지에서 수습된 토기와 도구의 변천을 통해 한강변에 정착한 선조들의 지혜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도 한눈에 알 수 있을 터이다.

● 제대로 된 박물관 하나가 더 소중하다
야외박물관 건립은 미사리 유적의 보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현재 미사리 일대에는 나날이 주택과 음식점이 늘어나고 축사와 창고가 건립됨으로써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 훼손되어 사라질 가능성이 높고, 발굴된 유적도 갈수록 보전이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정부의 그린벨트 해제에 따라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 인근의 하남시 풍산지구가 내년 하반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하면, 그 여파로 미사동 일대 역시 강한 개발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적을 보호하는 길은 유적지 일대를 야외공원으로 묶는 게 최상의 방책이다.
시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작은 도시 하남을 위해서도 미사리 야외박물관은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만 꾸민다면 미사리 역사고고학박물관은 국내는 물론 같은 문명권인 동아시아와 전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공원이 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미사리 야외박물관은 새로운 관광명소로서 하남시와 시민들에게 문화적 자부심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까지 안겨줄 것이다.
특히 미사리와 암사동, 몽촌토성, 풍납토성, 이성산성 등을 연계시켜 선사 시대와 역사초기 한반도 문화관광 코스로 개발하면, 백제를 자기네 문화의 본류로 인정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수도 있다.
물론 야외박물관 건립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우선 이를 실현하려면 미사동 전역에 대해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져야 적지를 선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곳을 중심으로 일을 추진한다 해도 최소 2만∼3만평의 사유지를 매입해야 야외박물관의 모양을 갖출 수 있다.
부지 매입비만 수십억원이 들고, 조성비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남시 단독으로는 이뤄내기 어려운 사업이다. 정부와 문화재당국, 그리고 경기도가 적극 지원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세운 야외박물관 하나가 조정경기장과 카페촌과 자연생태공원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자랑스럽고 더 유명해 질 수 있다. 하남시와 시민들이 먼저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